그곳에 우리가 있다. 평양에서 만난 ‘우리’
‘가장 많이 북한을 방문한 사진기자’
김정일 위원장이 유일하게 기억한 ‘남녘사진가’
사진가 임종진을 수식하는 말이다. 그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사진기자의 자격으로 여섯 차례에 걸쳐 북녘 땅을 밟았다. 당시가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인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는 해도, 북은 사진에 민감했다. 임종진은 처음부터 “나는, 우리가 서로 공감할 만한 무엇을 찍고 싶다.”고 밝혔다. 전 세계적으로 이질적이거나 낙후된 북한의 좋지 않은 이미지들만이 보도되던 시절이었다. 평양의 일상과 그 속에 담긴 ‘우리네, 우리 것’을 사진에 담으려는 그에게 유례없이 자유로운 촬영 허가가 떨어졌다. 평양 시내 곳곳을 별다른 제지 없이 다니며, 정치나 이념에 의해 삭제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그들의 민낯을 만나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는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들, 장을 보는 어머니,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가는 아버지 등 특별할 것 없는 모습들에 취해 ‘카메라가 춤을 추었다’고 회고한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북녘동포들의 일상을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낸 수백 점의 사진이 이렇게 해서 얻어졌다. 사진마다 이미 우리는 잃어버린 듯 한 어떤 정서와 순정한 빛이 20년 전의 버내큘러와 함께 가득하다. 갓 결혼식을 올린 신부가 상기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젊은 연인이 손을 잡은 채 강변을 걷고, 가방끈을 비스듬히 맨 여자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간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흔한 광경이다. 다만 다른 것은 아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아빠가 군복 차림의 ‘북한군’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북한의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사진이다.
어제의 사진이 아니라 이제야 만나는 ‘오늘의 사진’
이 사진들을 보기까지, 아니 그들을 이런 눈으로 보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두 번째 방북 시절 북측 안내원들의 “왜 우리 늠름한 장교 동무를 동네 아저씨처럼 찍었느냐”는 투정과 웃음이 섞인 항의를 받기도 했다. 빈곤과 폭압적 체제라는 단면적 시선을 거두고 한 민족의 정서적 일치점을 찾고자하는 임종진의 한결같은 관점은 이어지는 방북취재를 통해 신뢰의 연장선으로 이어졌다. 후에 자신들의 삶을 ‘민족적 입장에서 바라본 사진가’로, “김정일위원장이 남녘사진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림선생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도 북측 기관원들의 입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엄정한 군복 안에서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냄새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임종진’이기에 가능했다. 월간 <말>지와 <한겨레신문> 등 언론사 기자로 사진을 시작한 그는 취재활동 틈틈이 여러 나라의 빈민촌과 시골마을에 머물며 ‘작아 보여도 가치 있는 삶’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언론사를 그만두고 캄보디아에서 NGO 자원활동가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국가폭력이나 부실한 사회안전망으로 인해 정신적 내상을 입은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진치유기관이자 국제개발협력 분야 내 생명중심 대안적 이미지 창출기관인 (주)<공감아이>를 운영하며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도구’로서 사진의 쓰임을 탐색 중이다.
그동안 사진이 일조해 온 어떤 ‘이미지’를 사진으로 다시 바꾸는 작업 또한 임종진이 추구하는 새로운 사진의 역할이자 작업 방향이다. ‘북한의 이미지를 바꾸는 북한 이미지’로서, 사진전 <사는 거이 다 똑같디요>는 바로 그 첫 신호탄이 될 것이다.
“정책적인 통일은 위에서 정치가 한다면, 정서적인 통일은 밑에서 민간이, 예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이 사진들이, 그렇게 쓰이기를 바랍니다.”
20년 전 평양의 일상을 담은 이 사진들은 시간의 개념을 뛰어 넘어 남과 북 사이 가로놓인 ‘닫힌 정서의 길’을 열어준다. 그런 점에서 ‘어제의 사진’이 아니라 이제야 만나는 ‘오늘의 사진’이다. 가려져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고 왜곡된 인상들을 바꾸는 데서 더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한반도를 꿈꾸는 지금의 시점에서 남과 북, 서로를 정서적으로 보다 가깝게 이을 사진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