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개인전 : The Paradox of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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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2016년 5월 23일 ~ 2016년 6월 18일

장소 : 갤러리 분도, 대구광역시 중구 동덕로 36-15

계획을 위한 계획

모 든 글이나 기호는 수정 가능성의 원칙을 품고 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나 잘 그린 그림이라도, 작가가 욕심을 부리면 그것은 끝없이 지워지고 덧붙여질 수 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을 예로 든 제논(Zenon)의 역설처럼,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를 한없이 다듬어 고치더라도 비록 그 작품이 완벽에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완벽한 상태 그 자체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만약 어느 하나가 궁극적으로 완벽하다고 치자. 하지만 이 완벽함은 어디까지나 딱 이곳, 이때 유효할 뿐이지 시공간의 초월하며 만고불변의 우월함을 누릴 수는 없다. 책이나 신문처럼 찍혀서 나온 글도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일단 인쇄되어 나온 글은 의심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경전의 사례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 번 고정된 글에 신성한 권위가 서린다는 점은 40여 년 전에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일찌감치 비판한 적이 있다(당연히, 그 글들 또한 지금은 진리에서 벗어나 완벽하지 못하지만).

책 이 언제라도 수정될 당위성을 억누르고 있다는 상태는 현대미술가 김병주의 작품에도 보인다. 선들이 복잡하게 이어져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투시 도면을 닮았다. 그래서 그가 만든 부조 혹은 환조 작업은 앞으로 지어지거나, 아니면 이미 있는 건물을 뜯어 고칠 실현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삼차원을 준거한 입체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건축 투시도를 닮은 데다 그것들 중 상당수가 벽에 설치되는 부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작업에 관한 인식을 평면 회화와 조각의 중간 그 어디쯤으로 분류한다. 미술계는 그의 작업 형태를 ‘건축 조각’ 혹은 ‘공간 드로잉 조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도 뭔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뚜렷한 게 없다.

그 대신에, 나는 단지 한 명의 관찰자로 작품을 둘러싼 몇 가지 흥미로움을 눈여겨본다. 그의 조각은 어딘가에 있을 법한 건축물의 라인만을 떼어내어 가시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작품은 일견 합리적이고 정교해 보이지만, 막상 이 기호가 가리키는 대로 현실 속에서 건물을 세우면 어떻게 될까? 내 생각에, 작가 김병주는 우리에게 일종의 트릭을 던진다. 그는 역사에서 이어져 온 예술과 기술 간의 긴장관계를 작품에 담는다. 그런 긴장(아니면 양자 간 독립, 통합, 대결, 동조, 뭐라도 좋다)을 즉각적으로 보여주는 건축이 예시가 되었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전부터 생산성을 인정받은 예술 장르는 문학(시)과 건축이었다. 반면에 회화나 조각은 자연을 단순히 모사한다는 이유로 낮은 대접을 받았다. 미술가들은 이 가운데 건축에 대하여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구상으로부터 완성까지 전 과정을 통제하는 미술과 달리 단계가 분절되어 단순 기능에 의지하는 건축의 시각적 의미를 애써 한정시켜 바라보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 김병주의 작품은 건축에서 제한된 하나의 과정을 자기 미술의 거의 대부분으로 채웠다. 어쩌면 이는 역설이다. 그의 작품은 미적 시선의 예리함과 손놀림의 정밀함 자체를 모사했지, 현존하는 대상을 모사한 게 아니다. 동시대 미술 안에서 이와 같은 속임수로 이루어지는 가상의 현현은 빈번하다.

비 평가들을 포함한 관객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속아 넘어간다. 뭔가 하니까, 지금까지 김병주의 작업을 해석하고 기술한 평론이 작가가 그럴듯하게 고정해놓은 재현의 정교함이란 덫에 걸려서 비평문 또한 굉장히 분석적이고 합목적적인 투로 써진 경우가 많았다. 꿈보다 해석이다. 난 그 글들이 재미있다. 예컨대 이런 게 있잖나. 물리학자가 이 세계의 시공간을 강의실 칠판에 길고 복잡한 수식으로 전개하는 영화 장면이 있다. 이는 그 자체가 고유한 미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라는 허구 속에서 진리를 찾는 시늉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은 키치에 가깝다. 평론가들은 칠판 위 수학 공식이나 건물 투시도가 품은 허구적 논리를 따라가지 말고, 작가가 풀어나가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좋다. 김병주가 지닌 미술시장에서의 힘을 확인하려고 준비된 이 전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획자들이 가령 ‘미술과 건축의 융합’ 같은 안이한 말장난으로 작가를 끌어들이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작 가가 축조 해놓은 또 다른 세계의 원리를 꼽자면, 그것은 면의 생략이다. 이 말은 오로지 선을 살린다는 식으로 말해도 되겠다. 한 가지 색으로 바탕을 이룬 아크릴 평면 위에 금속으로 만든 선을 조립한 구성체는 착시와 연상 원리로부터 공간감을 얻는다. 우리 인지 체계가 덜 완성된 대상을 자기 경험으로 보충해서 온전한 이미지를 상상하게끔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생략의 힘은 크다. 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빼면, 그건 하나의 결핍에 그치지 않고 훨씬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불러들인다. 여기에 우레탄 도장으로 마무리된 갖가지 색의 실험은 그 빛의 뒤에 드리운 그림자까지 경쾌한 외양으로 배치한다.

흰 색의 공간 안에 놓인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원색과 돌출된 면 때문에 아주 분명한 기호로 도시 공간의 일부를 떼어 온 척한다. 그렇게 확정된 공간 점유는 이 시대에서조차도 예술이 기술을 종속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는 김병주의 작품 하나하나가 그 속에서 실현하는 건물을 얼마만큼 정확히 완성했는지 따지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 난 작품이 비현실적이고 다르게, 혹은 틀리게 완성된 부분이 어느 정도 차지하고 있는지 더 궁금하다. 딱 그만큼이 예술의 자율성이다. 다른 제도의 간섭이나 종속을 거부하는 분산(variance)의 정도야말로 예술이 세계에 맞서는 형식이다. 보통 그런 싸움은 겉보기에 아주 혼란스럽게 다가서지만, 김병주가 벌여가는 전략은 공간의 질서를 따라가는 듯 비켜나는 듯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동선을 펼친다. 곡선과 직선이 터놓은 길 위에서 균형을 잡아 나아가는 그의 외줄타기는 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외감을 안겨준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원출처 : http://www.artbava.com/exhibit/detail/3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