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과 한양도성전을 열면서…
2014년 서울도서관 기획전시실에서 ‘북한산과 한양도성전’을 한 이후 같은 제목으로 다시 전시를 하게 되었다. 2014년 서울 시청 기획전시실 전시 이후 6년만인데 전에 전시를 하면서 갖춰졌던 그림들과 그 후 추가로 작업 한 그림들을 선보이게 되었다.
필자가 그동안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그려 온 것은 지리적 특별함과 빼어남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새 나라를 개창한 조선의 태조는 여러 각지를 물색한 끝에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였다.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인 만큼 그 과정에서 아주 신중히 입지를 살피었다. 그 시대에는 풍수지라사상이라는 입지를 살피는 아주 확고한 사상과 신념이 있었다. 명당은 결국 땅의 형국이 빚어내는 것이고 터와 연관된 산과 강의 형세가 그 우열을 가려지게 한다.
선조들은 터를 보는 눈이 좋았다. 소위 명당을 찾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옛 시대 사람들은 터를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다녔다. 그처럼 명당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입지가 중요했다. 작은 집을 지을 때도 그랬다. 터가 규모 건물의 성격 등 모든 것을 규정했다. 궁궐에 맞는 터가 있고 집 지을 때 맞는 터, 서원에 맞는 터가 따로 있다고 여겼다. 나는 그동안 전국의 우리 전통건축을 많이 돌아보아서 그 실제의 차이를 느끼고 있다.
한양은 풍수상의 명당과 길지로 꼽히는 입지조건과 형국을 갖추고 있다. 한양도성은 사신사의 풍수 형국에 기초해 조성되어 있다. 한북정맥을 타고 흘러온 북한산의 준수한 기세와, 그것과 이어진 산세가 도읍의 삶터를 양팔로 감싸 안듯 백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 등 사사산이 둘러치고 넉넉한 도읍의 터전을 크게 휘돌아가는 한강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명당수가 흐른다.
건축가로서의 나의 직업은 땅을 살피는 것과 큰 연관이 있다. 그것은 나이를 먹고 건축가로 살아가는 연륜이 늘어날수록 더욱 중요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종주를 할 때 가졌던 역사와 지리의 관심이 커지면서 한양의 입지에 대한 관심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
나는 한양이 도읍으로 들어서기전 그 땅을 맨 처음 대하던 풍경이 몹시도 궁금했다. 맨 처음 도읍지를 물색하던 발걸음에 비친 본래 지세대로의 모습은 너무도 좋았을 것이다. 오늘날 내가 느낀 것보다 훨씬 맑고 아름답게 펼쳐보였을 것이다. 그 넉넉한 터전을 대하며 가슴이 트여 후련해지고 그 뒤로 펼쳐진 북한산 산세의 기상이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은 천하 명당임을 금세 이해할 수 있지만 도읍을 찾아 헤맬 당시에는 쉽게 뚜렷이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곳 저곳을 물색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보면 이 이상 좋은 곳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북한산과 한양도성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양도성을 감싸는 사사산은 별개의 산으로 구분해 불리지만 전체적으로는 북한산에서 뻗쳐진 지형의 흐름과 맥락이 닿아 있다. 그리고 북한산은 조종산으로 기의 맥이 흐르고 있다. 한양은 그러한 입지를 바탕으로 수려한 산수 풍광을 이루고 있다. 한양도성의 남쪽 경계지점인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도심을 둘러싼 지형지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손꼽히며 평소에도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남산은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오는데, 그 곳에 올라온 관광객들은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경관을 놀라워하며 환호성을 지르곤 한다. 풍수지리상의 명당의 조건을 형성하는 서울의 주변 산들과 입지는 그처럼 누구나 깜짝 놀랄 만한 경관을 자아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양(서울)은 거대 도시로 변모해 왔다. 한양도성과 성저십리로 이루어졌던 한양은 한강 이남과 김포 등지까지 광활히 확장되어 원래 입지 형국의 의미가 희미해지게 되었고, 자동차로 가득한 도로망과 빌딩숲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산과 강이 어우러진 특별한 경관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북한산을 오르거나 내사산의 봉우리에서 좀 더 멀리 시선을 두고 입지의 전체를 의식할 때는 여전히 그 본래의 산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필자가 그동안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꾸준히 그려온 데는 한양의 입지 조건에 따른 경관을 아름답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잊고 있는 모습들을 그림을 통해 다시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또한 한양(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입지 조건을 가진 삶터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내 안에서 그런 생각이 확산되고 한양의 입지적 중요성이 점차 더 크게 다가오면서 북한산과 한양의 입지 전체를 실경으로 담아두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고장 주변에 이 터의 기운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터전이 어떠한지를 그리고 얼마나 좋은 땅에 살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 시대 대도시로 변한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빌딩만 가득 들어차 보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지금도 그 형세가 살아 있고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될 때 처음 이 터를 도읍의 터로 바라볼 때처럼 다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경조오부도 등의 그림들은 현대에 지도와 같은 구실도 한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과학적으로 측량한 현대의 지도에 나타난 공간들과 차이가 있다. 그래서 틀린 지도라고 말하기 쉽다. 하지만 산세와 물길이 만나는 입지 측면에서는 현대 지도에서 알 수 없는 입지형국이 확연히 들어온다. 당시에는 그 점이 중요시 되었던 것이고 지급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지도에 나타난 산줄기 강줄기는 관념적 표현으로 되어 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의식하며 선조들의 그림이나 지도에 관념적으로 묘사된 대상들의 실제 모습을 그림에 담아 한양의 입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하고자 했다.
한양도성은 어디서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보인다. 특히 북한산과 어우러지며 넉넉하고 큰 기세로 느껴진다. 너른 시각으로 대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모습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낙산 구간을 그릴 때나 남산 구간과 인왕산 구간을 그릴 때도 준수한 북한산의 모습이 배경으로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 입지의 바탕에 산과 강이 있다. 한양(서울)은 준수한 산세와 크고 넉넉한 물줄기가 어우러진 빼어난 삶터이자 그 자체가 그림의 소재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한양(서울)은 삶터로서 특별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늘 좋은 기운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서 그 존재를 잊고 살아가기 쉽다. 그동안 선조들의 터를 보는 높은 안목으로 도읍으로 정한 한양의 빼어난 입지를 모두 실경으로 담아두고자 지난 10년간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줄 곳 그려왔다. 필자가 현장의 필치로 포착한 북한산과 한양도성의 그림들을 대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생각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소중함을 다시 되돌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0년 1월
一梅軒에서 김석환
원출처 : http://www.kaah.or.kr/html/sub06_1.jsp?ncode=a002&num=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