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누각 「의성 대곡사 범종루」, 고려말 지방관리 청렴함 기린 「순천 팔마비」도 –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공주 갑사 대웅전(公州 甲寺 大雄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의성 대곡사 범종루(義城 大谷寺 梵鍾樓)」,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 등 3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
공주 갑사 대웅전은 정유재란 이후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대체로 원형을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웅전 내부의 ‘갑사소조삼세불(보물 제2076호)’이 1617년에 만들어졌고,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고려하면, 갑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17세기 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건축으로서 갑사 대웅전은 전환기 건축의 특징을 지닌다. 정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의 구성인데, 정면이 5칸이면서 맞배지붕을 한 사례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정면과 배면 공포의 형식이 동일하고, 기둥 간격이 정면 중앙 3칸이 12척, 측면과 나머지 주칸은 8척으로 나타나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간결하게 배치하고 있다. 목구조에서 휘어진 재료를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사용한 것은 경제적 상황과도 연관되어 이 시대에 새로 등장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갑사 대웅전은 17세기에 지어진 다포계 맞배집의 전형적인 형식을 공유하면서 조선 후기의 건축적 경향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 맞배지붕: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 다포: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 놓은 건축양식
또한, 연혁과 유래를 알 수 있는 각종 기록과 유물이 잘 남아 있고, 평면구성과 공포의 구성수법, 상부 가구와 닫집 등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등 17세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 닫집: 건물 내부의 불단 위에 또 하나의 지붕모양을 짜 올린 것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전소되어 17세기 중·후반인 1644년에서 1683년 사이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범종루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현존하는 누각 건축 중 17세기 전반의 것은 대부분 3칸 평면을 가지고 있고, 이후 누각 평면이 3칸에서 5칸, 7칸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경향을 살펴볼 때 범종루는 기존에 남아 있는 누각 건축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각의 하부 기둥은 자연곡선이 살아있는 기둥으로 임란 이후 목재수급의 어려움, 조선후기 자연주의 사상과 맞물려 살림집과 사찰 등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대들보는 대개 단일부재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범종루는 같은 크기의 부재가 2단으로 걸려 있다. 이처럼 2단의 보가 쓰이는 형식은 보기 드문 사례이며 상부 보 부재가 대들보 역할을 하고, 하부 보부재는 보받침 부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누건축을 비롯한 사찰불전에서 찾기 어려운 사례이다.
* 보: 기둥과 기둥 위에 수평으로 걸진 부재로 상부의 하중을 받는 부재
기둥 사이에도 포를 둔 다포계 양식이나 중앙 칸에 화반을 사용한 점은 주로 주심포와 익공양식에서 많이 쓰이는 형식으로 다포, 주심포, 익공의 공포양식이 고루 나타나는 절충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화반은 중앙칸에 올려져 상부가구를 받고 있는데 이는 상부구조를 견디기 위한 의도적 구성이며, 정‧배면이 좌‧우측면보다 크고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 화반: 기둥 사이에서 창방 위에 설치하여 상부 부재를 받치는 넓은 판재
* 주심포: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된 건축양식
* 익공: 기둥 위에서 전면으로 조각한 부재를 내민 부재(쇠서)를 놓아 꾸민 건축양식
* 창방: 기둥상부에 가로지르면서 기둥과 기둥을 서로 연결한 부재
공포의 첨차와 살미의 형태, 창방을 비롯한 다수 부재의 의장적 요소 등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적 특징이 잘 남아 있다. 특히, 중앙칸에 주간포를 생략하고 화반을 대체한 절충식 양식이 주목된다. 범종루는 의성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17세기의 양식적 변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누각 건축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 첨차: 공포에서 기둥위에 도리방향으로 살미와 십자맞춤으로 되는 짤막한 부재
* 살미: 공포에서 보방향으로 첨차와 직각으로 짜올린 부재로 초새김한 의장 부재
* 주간포: 기둥과 기둥사이에 짜인 공포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건립한 비석이다.
최석의 행적과 승평부의 읍민들이 팔마비를 건립한 사실은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 열전(列傳): 많은 사람의 전기(傳記)를 차례로 기록한 책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년(1597년, 선조 30)의 병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
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陰記)는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
* 음기(陰記):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비석은 상면이 둥글게 처리된 비갈형(碑碣形)이다. 비석의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cm, 두께는 약 16.5cm 이다. 전면에는 액을 만들어 글씨를 새겼는데, 액의 상부는 귀접이 형태로 하였다. 액의 크기는 높이 약 140cm, 폭은 약 63cm로서 그 내부에 ‘八馬碑(팔마비)’ 석 자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글자 한 자의 지름은 약 48cm로 상당히 크다. 비좌(碑座)의 크기는 가로 140cm, 세로 76cm, 높이는 33.5cm이며, 비를 세우기 위해 파 넣은 홈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8cm 이다. 비좌의 상면에는 비신을 받치기 위한 호형(弧形)의 2단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높이는 각각 약 2.5cm 정도이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를 덮는 돌), 비신(碑身,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대좌(臺座, 불상을 놓는 대)를 갖춘 비와는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는 불교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 비갈형(碑碣形):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모양으로 만들어 비(碑)와 그런 것을 얹지 않고 머리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인 갈(碣)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액: 비석에 액자처럼 도드라지게 구획한 것
* 귀접이: 물건의 귀를 깍아 버리거나 접어서 붙임
* 비좌(碑座): 비석의 몸체를 세우는 받침
* 호형(弧形): 활 같이 굽은 모양
순천 팔마비는 건립된 이후 중건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의 위상과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하여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팔마비의 주인공인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충분하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공주 갑사 대웅전」, 「의성 대곡사 범종루」, 「순천 팔마비」 등 3건에 대하여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