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경전․풍수지리서, 청화백자도 보물 지정 –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을 비롯한 가야문화권 출토 중요 유물 5건과 조선 시대 전적문화재 2건, 조선 전기 도자기 등 총 8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하였다.
이번에 지정된 가야 시대 유물 5건은 1980~90년대에 발굴된 합천 옥전과 함안 마갑총 고분 등 대표적인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시기는 5~6세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신비의 왕국으로 알려진 가야의 생활상과 기술 수준에 대한 실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유물들로, 그동안 미진했던 가야 유물에 대한 역사‧학술‧예술적 가치를 재평가하여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보물 제2041호「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咸安 馬甲塚 出土 馬甲 및 環頭大刀)」은 1992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마갑총(馬甲塚) 조사 때 발굴한 유물로, 무덤 주인공의 좌우에 하나씩 매장되었던 것이다. 두 유물은 함께 나온 여러 유물들에 대한 연구 결과, 5세기 아라가야에서 제작하여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철제 말갑 옷은 말머리를 가리는 투구, 목과 가슴을 가리는 경흉갑(頸胸甲, 목가슴드리개),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身甲)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 말갑 옷은 그동안 여러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적이 있으나 원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된 사례는 거의 없어 희귀성이 높다. 또한, 고리자루 큰 칼은 철을 단조(鍛造,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모양을 만듦)하거나 철제 위에 상감(象嵌, 무늬를 새김)과 타출(打出, 철판 밑에 모형을 대고 두드려 겉으로 모양을 나오게 함) 기법이 고루 적용되어 가야인들의 철 조련 기술, 공예기법 수준, 조형 감각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철제 무구와 중장기병 전술이 확산되는 양상과 높은 수준의 철기 제작기술이 개발되고 교류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 유물의 희소성과 완전성 등에서 역사‧학술‧기술사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보물 제2042호「합천 옥전 M3호분 출토 고리자루 큰 칼 일괄(陜川 玉田 M3號墳 出土 環頭大刀 一括)」은
1987년~1988년에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옥전 M3호분을 조사하다가 발굴한 유물이다. 옥전 M3호분은 가야 고분 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도굴도 되지 않아 당시 최고 수장(首將)의 묘제(墓制)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무덤이다.
* 옥전 고분 중에는 명칭에 ‘M’자가 붙은 사례가 있는데, 이는 발굴지 주변에 큰 구릉
(mound)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고고학 용어임
대가야식 ‘고리자루 큰 칼 일괄’ 4점은 여러 점의 칼이 한 무덤에서 일괄로 출토된 최초의 사례이자, 손잡이와 칼 몸통 등을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해 삼국 시대 동종유물 중 제작기술과 형태 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 4점 중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용봉문 고리자루 큰 칼’의 경우 손잡이 부분에 가는 은선(銀線)으로 전체를 감은 후, 그 위에 매우
얇은 금박을 붙인 흔적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리나라 전통공예기법인 ‘금부(金鈇)’의 일종으로, 이미
삼국 시대부터 이러한 기법이 사용되었고 그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확인해준다.
* 금부(金鈇): 금속의 겉표면에 열을 가해 얇은 금박을 붙여 화려함을 극대화한 전통공예기법
‘합천 옥전 M3호분 출토 고리자루 큰 칼 일괄’은 가야 최고 지배층의 장묘(葬墓) 문화와 한국 전통공예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는 점,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대사, 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 제2043호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二十八號墳 出土 金製耳飾)」 한 쌍도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1985~1986년에 옥전 M3호분을 조사하다가 발굴한 것으로, 현존하는 가야 시대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 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는 사슬고리나 S자형 금판고리를 연결하여 기다란 형태를 만든 것으로 신라나 백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야의 독창적인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식의 금귀걸이는 대체로 5세기 가야 문화권에서 주로 유행했으며, 5세기 후반~6세기에는 일본에도 영향을 끼쳐 가야귀걸이와 유사한 작품이 다수 전래되고 있다.
* 일본 규슈[九州] 지방 구마모토현(熊本縣)의 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6세기 금귀걸이의 경우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귀걸이와 매우 흡사하여 가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음
정식 조사를 통해 발굴되었기 때문에 출토지가 확실하고, 5세기 가야의 고유한 형태를 지닌 점, 일본에 영향을 끼친 점, 한 쌍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야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 큰 의의가 있는 유물이다.
보물 제2044호「합천 옥전 M4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M4號墳 出土 金製耳飾)는 좌‧우 한 쌍이 온전히 남아 있고 무덤의 주인공이 귀에 달았던 곳에서 발견되어 실제 사용된 사실도 확인된 유물이다.
이 귀걸이가 중요한 이유는 가야귀걸이 양식의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양식인 가늘고 둥근 주고리(세환이식, 細環耳飾) 아래 속이
빈 공 모양의 장식을 단 것, 그 아래 심엽형(心葉形) 장식을 달고 마지막으로 산치자 열매 모양의 입체형 장식을 단 특징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 심엽형(心葉形): 나뭇잎(보통 ♡ 모양) 모양
특히, 장식마다 금 알갱이를 테두리에 붙이거나 금선(金線) 형태를 만든 누금세공기법(鏤金細工技法), 금판을 두드려서 요철(凹凸) 효과를 낸 타출기법(打出技法) 등 다양한 공예기법이 적용되어 가야 시대 금속세공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6세기 전반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융성했던 합천 지역 가야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가야귀걸이 중 보기 드물게 누금세공기법과 타출기법이 모두 다 사용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예술 가치가 높다.
보물 제2045호「합천 옥전
M6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M6號墳 出土 金製耳飾)」한 쌍은 1991년~1992년까지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옥전
M6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목곽(木槨)의 남쪽에 놓인 무덤 주인공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 옥전 M6호분은 규모가 큰 중형급 무덤으로, 보관(寶冠), 목걸이, 귀걸이, 고리자루 큰 칼(環頭大刀), 화살통, 장식 마구(馬具) 등이 함께 출토되어 옥전지역 고분 중에서도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음
출토지와 발견 위치, 함께 출토된 유물이 확실해 고고학적 맥락이 뚜렷하고 현존하는 가야 산치자형 장식을 가진 금귀걸이 중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주고리의 2단 중간 장식, 격자형 원통형 금판으로 연결된 공 모양 장식, 인(人)자형 고리에 산치자형 장식을 달고 마지막 끝을 금 알갱이로 마무리한 것은 신라 금귀걸이의 중간식 형태와 가야의 산치자형 끝장식이 결합된 독특한 혼합양식으로, 6세기 가야 지역의 교류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이렇게 금 알갱이를 장식 끝부분에 붙인 예는 창녕 계성 A지구 고분, 고령 지산동 44-11호분과 45-1호분 귀걸이와 합천 옥전 M4호분 귀걸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가야 지역에서 널리 쓰인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가야 금귀걸이의 특징을 잘 간직한 작품이자 이 시기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서 의의가 크다.
이외에, 보물 제2056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一~二)」는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중요시하는 경전(經典)의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진 대표적 책이다.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능엄경’이라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 대승불교(大乘佛敎): 일체 중생의 성불(成佛)을 인정한 불교의 흐름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이하 능엄경 권1~2)는 총 10권으로 구성된 내용 중 권1~2에 해당하는
경전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승려 신총(信聰)에게 대자(大字; 큰 글씨)로 판하본(板下本)을 쓰게 한 뒤 1401년(태종
1년)에 판각하여 간행한 것이다.
*판하본(板下本): 목판 불경을 만들기 전에 종이에 먹으로 쓴 불경, 즉 목판본의 원본을 말함
나뭇결의 마모와 종이의 상태로 보아 처음 판각된 이후 조금 늦게 인쇄된 것으로 보이며, 15세기 말까지 사용된 반치음(ᅀ)과
옛이응(ᅌ) 등의 묵서 기록 또한 간행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교정 흔적은 「간경도감」(刊經都監) 언해본
간행을 위한 과정으로 판단되어 늦어도 15세기 무렵 인쇄된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동일 판본인 보물 제759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의 일부 빠진 장수(張數)를 보완해 주고 본문 왼쪽에 일(一), 이(二) 등 해석을 돕기
위한 석독구결(釋讀口訣)의 사례 등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구결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 석독구결(釋讀口訣):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을 수 있도록 문장 사이에 달아 놓은 구결
이 책은 조선의 독자적인 필체에 의한 판본으로서, 조선 초기 불경 간행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중세 국어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하여 연구‧보존할 가치가 있다.
보물 제2057호로 지정된「지리전서동림조담(地理全書洞林照膽)」은 조선 시대 관상감(觀象監) 관원을 선발하는 음양과(陰陽科)의
시험 과목 중 하나로 널리 사용된 풍수지리서다. 중국 오대(五代) 사람인 범월봉(范越鳳)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 관상감: 조선 시대 천문‧지리‧측우(測雨) 등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
* 음양과: 조선 시대 관상감의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 길흉‧화복을 연구하는 학문)을 담당할 관리를 뽑기 위한 시험
중국에서는 「지리전서동림조담」에 일부 주술적 요소가 있어 주희(朱熹) 등 송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조선에서는 과시(科試, 국가시험)의 과목으로 채택됐다. 이 사실은 이 책의 내용이 조선 고유의 풍수관(風水觀)을 성립시킨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에서 풍수지리가 역사‧문헌적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상권과 하권
2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은 조선 건국 후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인쇄되었다. 서문이나 발문 그리고
간기(刊記, 펴낸 시기, 주체 등의 기록)가 없어 간행과 관련된 사항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계미자 중자(癸未字 中字)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태종 연간(1400~1418)에는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 계미자 중자(癸未字 中字): 활자의 크기에 따라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小字)로 나뉨
조선 시대에 문‧무과(文‧武科)와 생원‧진사(生員‧進士) 선발 시험인 사마과(司馬科) 수험서인 유학서적은 상당수 간행된 데 비해, 잡과(雜果)의 풍수지리서는 수험생이 적어 많이 간행되지 않았으므로 전래본이 매우 희소하다.
간행본이 거의 없는 희귀본이라는 점 외에도 고려 말~조선 초기에 사용된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인출되었다는 점, 조선 시대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풍수지리서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서지학적 의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보물 제2058호로 지정된「백자 청화매조죽문 항아리(白磁 靑畵梅鳥竹文 壺)」는 높이 약 27.8cm 크기의 아담한 청화백자
항아리로, 조선 전기인 15~16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뚜껑이 있는 입호(立壺) 형태로, 겉면에 매화(梅), 새(鳥),
대나무(竹)로 구성된 ‘청화(靑畵)’ 물감으로 그린 도자기다. ‘청화’ 물감은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1463~1469년 사이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청화(靑華)’로 한자를 표기하기도 하나, 이는 일본식 용어이고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에
‘청화(靑畵)’로 다수 표기되어 있어 현재 학계에서는 ‘靑畵’를 보편적으로 씀
매화를 화면에 크게 배치해 전반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다양한 동작의 새를 표현해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마치 먹의
농담을 활용하듯 청화안료의 색조와 분위기를 잘 살려냈고, 발색(發色)이 좋아 작품의 품격을 높였다. 이렇듯 수준 높은 기법과 회화
표현을 볼 때 이 작품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 참여한 조선 시대 관요(官窯) 백자로 추정된다.
* 도화서(圖畵署): 조선 시대 그림을 담당한 관청
* 관요(官窯): 왕실용 도자기를 굽기 위해 나라에서 운영한 가마
국보 제170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白磁 靑畵梅鳥竹文 有蓋壺)’와 비교해 볼 때 뚜껑이 없어 온전한 한 벌이 아닌 점을 제외하면 정제된 백자의 바탕흙(태토, 胎土)과 문양을 장식한 기량이 거의 흡사하다. 이러한 청화백자는 사용계층이 한정되었고 제작 또한 제한되었기 때문에 전래 수량이 많지 않아 희소성이 있다. 제작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시대 변화를 잘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