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매주 금요일, 서울에서 당진으로 초등학교 수업을 가게 되었다. 2월 말 처음으로 가본 그곳은 가는 데만 4시간 걸렸고, 버스정류장에서 학교까지 ‘곧고 쭉 뻗은 길’ 주위로 황량한 논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을 걸으며 ‘당진에 관한 것이면서 당진에 대한 것이 아닌’ 책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허전한 내 삶에 뭔가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12월 말까지, 당진에 갈 때마다 기록했고 그것을 참고로 한 마을의 계절변화와 그날의 경험을 담은 서른다섯 날의 이야기를 썼다. 기행문 형식이지만 사실 당진을 빌미로 내 얘길 하고 싶었다. 누구도 관심 없을 것 같은 개인의 고백을 ‘어떤 형식도 대상도 없는 오직 나를 위한 공허를 메꾸기 위한’ 글로 털어놓은 것이다. 그러한 의도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게 각 이야기별 소제목이다. (#씁쓸하다, #무책임하다, #맛보다, #위로하다)
그 이야기로 1년간 서른다섯 장의 똑같은 ‘부엌풍경’을 그렸다. 각 이미지는 당진에 간 날짜에 맞춰 그날 일어난 시각부터 다시 집으로 돌아온 시각까지, 같은 자리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펜으로 선을 채워 넣은 것인데, 이 당시 당진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흐릿했고 찍었던 사진들도 폴더에 저장만 해두고 거의 본적이 없었다. 대신 글을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그림을 그리고 폐기하고 다시 그리고를 통해 기록은 선명해져갔다. 그것으로 그날의 기억은 시간이며, 시간은 밀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날 기록한 시간만을 기억하며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리는 과정에서 날짜와 시각을 못 지킨 적도 있었지만, 머문 시간만큼은 지키려 했다. 그렇게 한 자리에서 그 시간을 버티고 채우는 것, 그날의 기억을 남기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시간은 지나갔고, 지금도 가고 있는데, 붙잡아도 돌아오지 않는데, 시간을 지킨다고 그날의 기억을 남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기보다 지겹게 그 시간을 버티는 게 아닐까? 공허감에 새벽마다 먹었던 음식처럼, 무엇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강박감에 썼던 글처럼, 무리를 해서라도 작업해야한다는 압박감에 그렸던 그림처럼, 그저 공백을 채우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그림들을 보며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다 수정할수록 명확해지는 글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남기기는 것보다 남기는 과정, 그 시간 속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진의 ‘곧고 쭉 뻗은 길’에 있을 때처럼 말이다. 그 길을 걷고 있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걱정도, 잡념도 일지 않았다. 그저 길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다. 거기서는 시간을 볼 필요가 없다. 다만 시간 속에 머물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듣고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역시 그렇다. 그러니 또 다른 길을 향해 계속 걷기로 했다.
이때도 기록을 참고삼아 이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공간에 펼쳐놓고자 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있는 것으로, 공간 자체가 책이 되도록 모든 것을 응축해서. 먼저 책을 만들면서 나온 찌꺼기―수정한 원고 뭉치, 당진에서 수집한 것들, 그 당시 썼던 메모와 드로잉, 실패작들―를 재료로 석고 붕대로 덩어리를 빚고, 3개의 캔버스에 붙이고 사포로 벗기고 칠하고를 여러 번 반복한 뒤 흰 바탕칠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영상으로 찍고 편집했다. (후에 인쇄 사고로 쓸모없게 된 책도 쓸모있는 것으로 재탄생시켰다.) 이 작업은 공간 속에 머물며 천천히 느리게 이루어졌고, 얇은 층을 여러 번 쌓는 과정에서 텅 비어 보이는 흔적들이 남았다. 그 흔적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만 남겨둔 채 여백인 겨울의 곧고 쭉 뻗은 길”처럼 그 자리에 있으나 없는 것 같고, 텅 빈 듯 보이나 채워져 있다. 거기에 그날의 기억이 숨어 있다. 때론 감정일 수도 있고 흘러간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런 기억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텅 빈 하늘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떠오른다. 그 떠오른 이미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정말로 내가 남기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기억이든 흔적은 남는다. 기록하면 더 오래 남는다. 지금도 ‘당진에 관한 것이면서 당진에 대한 것이 아닌’ 이야기를 기록하며 흔적을 남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