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니 태극기‧김구 서명문 태극기‧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보물 지정 예고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등 4건은 문화재 등록 예고 –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광복절을 앞두고 태극기와 광복군 유물 등 항일독립유산들을 대거 보물과 문화재로 지정‧등록 예고했다.
12일에 열린 제4차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데니 태극기’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은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와 별도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 4건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독립운동사료를 포함한 근현대문화유산에 대한 적극적인 역사ㆍ학술 가치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2019년부터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들에 대한 검토를 시작해 작년에 「말모이 원고」 등 한글 관련 문화재 2건을 보물로 지정했으며, 이후 두 번째로 태극기 3건을 이번에 보물로 추가 지정 예고하는 결실을 맺었다.
* 조사대상 선정 국가등록문화재: ①데니 태극기(국가등록문화재 제382호), ②김구 서명문 태극기(제388호), ③불원복(不遠復) 태극기(제394호), ④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제458호), ⑤말모이 원고(2020년 보물 지정), ⑥조선말 큰사전 원고(2020년 보물 지정), ⑦윤동주 친필 원고(제712호), ⑧이봉창 의사 선서문(제745-1호)
「데니 태극기(데니 太極旗)」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가 소장했던 것으로,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 태극기가 데니의 유품 중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가 조선에 마지막으로 머문 해인 1890년을 제작의 하한연대로 보고 있다.
*O.N.데니: 1877년 중국 천진(天津) 주재 미국영사를 시작으로 1880년 중국 상해(上海) 주재 미국영사로 재직 중, 1886년 이훙장(李鴻章)의 추천을 받아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및 내무 담당 고문으로 부임. 이후 4년 동안 외교ㆍ법률ㆍ경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실무를 담당. 1886년 6월 조선과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 시 국제관례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이 불리한 통상 조약을 맺지 않도록 조선을 보호하고자 했고, 조선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서 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조력함. 1888년 3월 『China and Corea』를 발표해 서구의 국제법적 이론을 토대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히고 청의 내정간섭을 부정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인해 중국의 미움을 사 결국 1891년 1월 조선을 떠나게 되었음. 1977년 로버트 R. 스워타우트(Robert R. Swartout) 교수에 의해 ‘데니문서’가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본격화되었음.
‘데니 태극기’는 세로 182.5cm,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1882년 9월이었고 1883년 3월 6일 고종은 전국에 사용토록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19세기 말 한국의 국기가 반포된 이래 그 모습을 그리거나 기록한 자료들은 일부 남아 있지만 실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데니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태극기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설: ①태극기 제정은 1882년 5월 미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논의되었음.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의 회고에 따르면 5월 22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서로 국기를 교환했다고 함. 이를 방증하는 자료가 미국 국회도서관 슈펠트 문서철에 보관되어 있으며, 1882년 7월 19일에 미국하원이 태극기 도식(圖式)을 승인한 자료인『Flags of Maritime Nations』에도 실려 있음
②1882년 9월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영국공사 애스턴, 선장 제임스와 논의하여 제작하였고, 일본에 도착해 숙소에 건 것이 최초의 태극기라고 알려져 있음. 박영효의『사화기략(使和記略)』문건 안에도 이미 4괘와 8괘가 그려진 기(旗)가 준비되어 있었고 “상[고종]에게 명(命) 받은 바 있다”는 언급으로 보아 박영효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닌 조정에서 논의된 것을 일본으로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보여준 것으로 판단됨
*1883년 태극기 사용이 전국에 선포되었지만 규격 등이 정해지지 않아 1949년 국기 제작법이 제정될 때까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음
‘데니 태극기’는 제작기법 측면에서도 근대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 정세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당시 서양 국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참조한 것으로, ▲ 전통적인 손바느질이 아닌 상하 90cm 정도 크기의 넓은 폭의 면직물을 바탕재료로 하여 재봉틀을 사용해 박음질했다는 점, ▲ 청색ㆍ홍색 태극과 청색의 4괘(四卦)를 부착하는 데 있어 바탕천을 오려내고 두 줄로 박음질해 멀리서도 문양이 또렷하게 보이도록 시각적 효과를 꾀한 점 등 초창기 국기 제작법을 적용해 매우 정교하고 정성껏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깃대 속에 머리카락 또는 동물의 털 뭉치를 채워 넣은 사실이 과학조사 결과 밝혀졌는데, 이는 심을 튼튼하게 만들어 관공서 등에서 게양했을 때 세로로 단단히 버틸 수 있도록 착안한 방식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데니 태극기’는 ▲ 국기를 제정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한제국 외교적 노력을 증명하는 유물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한 열망의 상징이 된 태극기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 ▲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한 미국인 외교관 가문이 90여년 넘게 간직해 오다 우리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진정한 호혜(互惠, 서로 동등하게 혜택을 누림)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 ▲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태극기라는 점 등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할 사유가 충분하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金九 署名文 太極旗)」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메우스 Charles Meeus)에게 준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1941년 경 매우사 신부는 선교사로서 중국 충칭(中慶)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가기 전 김구 선생이 태극기에 글을 써서 주며 미국에 가서 우리 동포를 만나면 이 글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함. ‘김구 서명문 태극기’의 전래에 얽힌 일화는 미주 한인들이 발간한 신문인『신한민보』1942년 3월 19일자(3면)에 자세히 보도됨.
세로 44.3cm, 가로 62cm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의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어 제작한 소형 태극기이다. 깃대는 오른쪽에 천을 덧대어 만들었으며, 괘는 가로 상단에 건괘(乾卦)와 감괘(坎卦), 하단에 이괘(離卦)와 곤괘(坤卦)가 배치되어 있다. 깃대와 괘의 사이에는 김구 선생의 친필로 묵서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작고 네모난 인장이 찍혀 있다.
이 태극기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김구와 안창호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서명문에서 김구는 망국의 설움을 면하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광복군을 도와줄 것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 김구 서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강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의구(義句, 올바른 글)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ㆍ인력ㆍ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 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 지금까지 알려진 19세기~20세기 초 제작 태극기 중 정확한 제작시기가 알려진 유일한 자료라는 점, ▲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신념이 대표적으로 담겨 있다는 점, ▲ 매우사 신부로부터 안창호 선생이 태극기를 전달받기까지 상황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전래 경위가 분명하다는 점, ▲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극기의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제작되어 태극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ㆍ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서울 진관사 태극기(서울 津寬寺 太極旗)」는 2009년 5월 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ㆍ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신문류는 「경고문」ㆍ?조선독립신문?ㆍ?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ㆍ?신대한(新大韓)?ㆍ?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성각: 무병장수의 신(神) 칠성(七星)을 모신 불교 전각
*학계에서는 태극기를 숨긴 인물로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 혹은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던 승려라고 추정하고 있음. 백초월은 3.1만세운동 직후 비밀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불교계의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제공하는 등 국내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인물임. 또한 태극기가 싸고 있던 자료들이 1919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되어 국내에 밀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를 감추기 위해 태극기에 싸서 칠성각에 숨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되었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현재 1919년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 진관사 태극기와 발견된 독립신문류 현황
자료명 | 발행일 | 수량 | 비고 |
신대한신문 | 제1호 1919년 10월 28일 화요일제2호 1919년 11월 3일 월요일제3호 1919년 11월 12일 수요일 | 3점 | 단재 신채호가 발간한 신문으로 국내에 새롭게 알려짐 |
독립신문 | 제30호 1919년 11월 27일(2점)제32호 대한민국 원년 12월 25일(2점) | 4점 | 특히, 제30호에는 ‘태극기’라는 제목의 시(詩)가 수록되었음 |
조선독립신문 | <호외>제32호 1919년 6월 6일제40호 1919년 8월 12일제41호 1919년 8월제42호 1919년 8월 20일 | 5점 | |
자유신종보 | 제4호 미확인제7호 대한민국 원년 9월 19일제12호 대한민국 원년 10월 6일(4점) | 6점 | 중국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운동계 신문으로, 최초 공개된 자료 |
경고문 | 1919년 6월 1일 | 1점 |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한 경고문으로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 |
아울러 진관사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에도 태극기와 태극문양 및 태극기 관련 기사가 실려 있어 더욱 의의가 있다. 특히, 태극과 4괘가 우주 만물의 기본 요소나 만물의 생성ㆍ변화ㆍ발전하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힘과 사랑’을 토대로 ‘자유와 평등’을 온 세상에 실현해나가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당시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함께 살펴볼 수 있어 ‘진관사 태극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진관사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형태상으로도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부분과 4괘를 검정색 먹물로 덧칠해 항일 독립의지와 애국심을 강렬하게 표현했으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라는 점에서 항일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처럼 ‘진관사 태극기’는 ▲ 불교계 등 다양한 계층에서 주도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 ▲ 항일 정신을 형태상으로 강력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점, ▲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를 통해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ㆍ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해 문화재에 담긴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데니 태극기’ 등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주석이자 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인 김구의 주관 아래 거행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관련 유물이다. 서명문은 전례식에 참석한 중국 측 인사와 서방 외교사절, 신문사 대표들이 서명한 유일의 원본 방명록으로, 충칭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외교 활동, 언론 창구를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축하문은 전례식을 축하하는 의미로 중국 인사들이 보낸 것으로, 사진으로만 전해오던 당일 전례식 단상에 실제로 걸려 있었던 실물자료로 역사적 가치도 높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선전하여 항일 독립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기관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취지와 활동 상황을 군사, 외교, 국제정치,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기관지 제목인 ‘光復(광복)’의 글씨를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또는 지청천)의 필체로 활용한 점도 역사적 의미를 더하는 자료다.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은 1945년 5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소책자 형태의 훈련교재로, 조국 광복의 최선봉을 담당할 한국광복군의 ‘강철 같은 정신 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내용 구성은 일반강령, 기본정책, 본군의 정훈계획(학과훈련, 선전대강) 등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발한 독립운동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교재는 한국광복군이 이전까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다가 중국과 끊임없는 교섭을 거쳐 마침내 1945년 5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속으로 변경되어 그 통할을 받음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어 역사·사료적 가치가 높다.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는 1930년 1월 만주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金佐鎭, 1889.11.24.-1930.1.24.)의 사회장(1930년 3월)에서 낭독된 약력서다. 김좌진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한국독립운동사의 무장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본 약력서는 그의 출생과 성장, 사망, 주요 활동과 사상, 가족관계 등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김좌진 장군의 전 생애를 순차적으로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4건에 대해서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
이번 태극기 보물 지정 예고를 계기로, 역사‧학술적 중요성이 널리 인정된 국가등록문화재 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여 이를 국보ㆍ보물 지정 대상에 포함시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제도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계획이다. 또한, 항일독립유산 등 다양한 근현대문화유산을 꾸준히 발굴하여 지정‧등록하도록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으로 임하여 우리 문화재의 숨겨진 가치를 재조명하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다.
한편, 지난 6월에 등록 예고된 바 있는「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과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문화재로 등록했다.
「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은 1947년 4월 서윤복 선수가 광복 이후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KOREA'(코리아)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달고 국제대회인 ‘제5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받은 배지 형태의 메달이다. 서윤복 선수의 우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 군정 시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KOREA'(코리아)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세계에 알렸던 사건으로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6・25 전쟁 중 첫 출격(1952.12.14.)을 앞둔 환송행사(장행회(壯行會), 1952.12.5.)에서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천영성)에게 제2기 후배들이 응원과 성명(서명문)을 담아 전달한 태극기다. 응원의 내용은 ‘臨戰無退(임전무퇴)’, ‘信念(신념)’, ‘祖國統一(조국통일)’, ‘快男兒(쾌남아)’, ‘祝初出擊 先輩 千永星 中尉(축초출격 선배 천영성 중위)’ 등으로, 출격에 임하는 조종사에 대한 격려와 전쟁 승리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6·25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정규과정을 통해 조종사를 배출하려는 공군의 의지와 노고가 상징적으로 집약된 첫 출격의 기록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 천영성(1929~2019년/6·25 전쟁 중 62회 출격):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전투 항공지원작전(52.10.25 ~53.7.27)’ 에 F-51D 전투기 편대로 투입되어 적 벙커·동굴을 파괴하는 등 38선 북쪽의 설악산·속초지역 및 거진-간성지역을 확보하는데 기여(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역임)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이들 2건도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