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 민관이 힘을 모아 호남을 지켜낸 국난 극복의 전적지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전라북도 완주군·진안군에 위치한 「임진왜란 웅치 전적」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했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은 임진왜란 초기(1592년 7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 및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웅치 전투’가 발생한 곳으로 호남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조선군이 결국 승전하게 되는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 평가된다.
* 국난: 나라가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태로운 나라 전체의 어려움
* 전적지: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웅치’는 완주군과 진안군 사이 고갯길의 지명으로 웅치 일대의 옛길은 전주와 전라도 동부지방인 진안 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선조실록」등 여러 문헌에 기록된 ‘웅치’는 ‘웅현’,‘웅령’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는‘곰티’또는‘곰치’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전투가 일어난 지리적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난중잡록』(조경남) 1권, 선조 25년 상, 6월 23일 이후
전주 전 만호 황박이 모집한 군사 200명을 모아 웅현에 복병했는데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의 경계였다. 이때에 이광이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 등으로 복병장을 삼아 웅현을 파수케 하였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全州前萬戶黃璞聚自 募軍二百餘名設伏于熊峴乃全州鎭安之界 也時李洸使羅州判官李福男金堤郡守鄭湛等爲伏兵將把守峴上璞爲之助焉.」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한산’을 통해 재조명된 웅치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격해오던 왜군을 진안과 전주의 경계였던 웅치 일대에서 막아서며 전개되었다. 왜군은 결국 웅치를 넘어 전주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전투 과정에서 많은 전력을 상실하여 전면적인 공격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전주를 공격하여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자 했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승패를 떠나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서 의미를 가진다.
웅치 전투를 통한 호남 수호 이후, 관군과 의병이 경기도와 경상도로 진출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호남 지역으로부터 조달하는 등 임진왜란 극복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문화재청은 전라북도 완주군·진안군과 협력하여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임진왜란 웅치 전적」을 보다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시행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