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4일 ~ 2016년 5월 24일
이화익갤러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3길 67
여행 후 카메라에 남은 유명 관광지의 모습과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된다. 촬영과 편집이 용이한 디지털 기기에 의한 이미지 수집은 현대인에게 익숙한 생활패턴이 되어 여행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주변의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게 한다. 시각적 정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대상을 구분하는 인간에게 이미지의 역할은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중요한 사고의 원천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면에 있어서 첫인상이 그 사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스치듯 지나가며 찍어 담는 사진 속 이미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면접서류의 증명사진 한 장을 통해 우리가 그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것은 비단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시각적 이미지에 해당하는 문제일 것이다. 사실 이미지는 자신의 껍데기만 보여줄 뿐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어째서 그렇게 존재하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눈에 보임의 현상을 인지한 후 그 정보를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 하나의 현상을 보고도 수많은 담론과 이견이 발생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정보만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버릇은 이제 사람 사이의 문제만이 아닌데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단 몇 번의 클릭으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직접 가보지도 않은 외국의 유명한 성당이나 건축물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여러 명소까지도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 정보를 통해 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뭐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다. 한운성 작가는 이처럼 우리의 생활방식에 깊숙이 뿌리내린 이미지에 의한 성급한 판단, 그로 인한 오해, 진짜를 지나친 채 피상적인 겉모습만 습득하고 있는 현대인의 습성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작가 한운성 역시 여행 중 마주하게 되는 풍경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채집한다. 그러던 중 몇 년 전 업무차 방문한 영국 브라이튼의 Old Ship Hotel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으로 다가왔다. 이름만큼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낡은 호텔에 묵게 된 작가는 초청자의 서운한 대접에 의아함과 불쾌함을 느꼈는데 검색해보니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고 의미 있는 호텔이었다. 단순히 눈으로 보고 느끼는 불편함만으로 그 가치를 판단했던 작가는 이미지가 주는 표피의 가벼움을 넘어 얼마나 그 가치와 본질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한운성의 디지로그 풍경 시리즈는 디지털로 수집한 소재를 아날로그 방식인 그리기로 옮기는 작업이지만 단순한 대상의 재현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보았던 풍경 속 건물의 파사드, 즉 그 피부만 남긴 채 주변을 지워내어 마치 영화 세트장의 가벽이나 길거리 광고판 같은 형태로 바꾸어 벽처럼 얇은 껍데기만 남긴다. 2015년 작품 ‘Red Stairs’는 작가가 가족과의 여행 중에 발견한 소재이다. 잘 정돈된 휴양지에 아무런 간판도 없고 기능도 알 수 없이 덩그러니 서있는 건물은 햇빛을 반사하는 벽체의 색깔과 계단 그림자의 복잡한 무늬로 작가의 눈길을 끌었다. 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 건물의 역할은 결국 알 수 없었고 작가는 이 건물의 모습을 이미지로 담는다. 계단 밑 부분은 지워 없애고 주변을 정리하여 외벽 일부만 남기는데 작가가 당시 받은 느낌 그대로 도대체 아무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는 벽체 같은 형태로 마무리한다. ‘Duomo di Milano‘는 이태리 밀라노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마주하게 되는 대성당이다. 수백 년간 지어졌고 수백 년간 한군데에서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봤던 성당은 이제 관광객 카메라의 배경으로 최고이다. 사실 밀라노에 살고 있지 않는 한 사계절과 그에 따른 일조량에 의해 변화하는 대리석의 빛깔을 느끼기에 우리가 머무르는 시간은 너무 짧다. 작가는 밀라노 대성당을 길거리 광고판에 집어넣는다. 지금은 예전 같은 절대 권력과 상징성을 거의 잃었지만 얇은 광고판 속 성당의 모습은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낸다. 현대 도시의 이정표와 시설물에 둘러싸인 광고판 속의 대성당 그림은 어쩌면 현실보다 이미지 속에 있으므로 비로소 지난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하다. ‘Köln‘ 역시 쾰른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다. 밀라노 대성당과 같이 과거의 위용과 절대적 권력은 사라졌지만 다른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 쾰른 대성당을 바라 본 작가는 권력과 영광이 얼마나 한시적이며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음을 상징하기 위해 지상에서 살짝 띄워서 그렸다. 지상에서 예민하게 떠있는 쾰른 대성당은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마치 풍선처럼 가볍게 보인다. 2014년 작품 ‘콘크리트 광화문’, 목재로 만들어진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콘크리트로 대체된 채 껍데기만 남은 광화문은 지지대의 힘을 빌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가장 존엄한 장소에서 최고의 권력자를 위해 존재했던 이 구조물은 본래의 성질을 잃고 변형되었지만 우리는 역사의 산물로 모셔놓았다. 껍데기로 남았지만 그것조차 본래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껍데기가 된 콘크리트 광화문을 그리면서 작가는 삶과 죽음의 허무한 기분을 맛보았을 것이다. 끝으로 2015년 작품 ‘금릉할인마트’는 서울 인근 신도시 상가의 외벽을 옮겨놓은 모습이다. 제각기 다른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소리 지르는 듯 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조형물로 변형되어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 대변한다. 실제 건물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이 간판으로 뒤덮인 건물에서 작가는 껍데기 위에 또 다른 껍데기들을 올려놓고 정신없이 현실을 이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엿보았을지도 모른다.
한운성의 디지로그 풍경 시리즈는 시각적 이미지의 재현에 대한 연구를 넘어서 이미지 조각의 단서를 통해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새로운 시선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이 채집한 장소의 이미지를 껍데기만 남겨 놓았지만 작품내부에 작가 사인은 당시의 년도와 심지어 작품 속 장소의 주소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을 화면 속으로 재현한 작가의 작품이 현장의 이미지를 옮겨놓은 껍데기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그 자체로 작가에게는 최종적인 현실이며 시각적 의미의 진실인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한운성의 작업은 실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어쩌면 그동안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 이면에 숨어있는 진짜의 모습, 파사드 뒤에 실존하는 본질을 캐묻는다.
김동현(이화익갤러리)
원출처 : http://www.leehwaikgallery.com/exhibition/digilog_landsca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