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는 1월 29일(화)부터 3월 3일(일)까지 2019년 첫 번째 전시로 민정기의 개인전 《Min Joung-Ki》를 개최한다. 국제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40여 년 이상을 회화의 영역에서 풍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관점들을 다뤄 온 작가의 예술 여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구작 21점과 신작 14점을 소개할 예정이다.
민정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현실적이면서도 인문적인 성찰의 결과로 재해석하는 작업 스타일을 구축해왔다. 그간 산세, 물세 같은 지형적 요소와 그 안에 어우러진 인간의 흔적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데 반해,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관심이 최근 자연에서 도심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 수도였던 서울 시내에 산재한 건축물이나 터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재구성하는 작품들을 새로 선보일 예정인데, 종로구에 위치한 청계천, 사직단, 세검정, 백사실계곡 등의 장소가 이러한 신작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물론 작가는 1980년대에도 도시 풍경을 다룬 바 있다. 그러나 당시의 도시 풍경에는 자의적인 기호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지금의 서울 풍경에는 과거 역사나 현 지리를 포함해 직접 인연을 맺는 필연적인 요소들이 수수께끼처럼 얽혀 있다. 그 장소들이 하나의 고정된 관점에서 제시되는 대신 두 가지 이상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것도 변화한 점이다.
1949년생인 민정기는 1980년대 초 스스로 ‘이발소 그림’이라 지칭하는 작품들로 국내 화단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국전을 중심으로 추대되던 순수미술 또는 추상미술에 대한 반(反)미학적인 공격에 근간을 두었는데, 예컨대 이발소에 걸려 있던 상투적이며 키치(kitsch)에 가까운 그림들을 가져다가 고급 재료로 여겨지는 유화 물감으로 정성스럽게 모사한 작품도 있었다. 이 ‘정성스러운 모사’에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가 깃들여 있었다. 미술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심미적 대상이기보다 일상의 언어처럼 대중이 공감하는 정서나 진실을 소통하기 위한 도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이런 이유로 민정기 작품에서는 개별성에서 진화한 ‘독립성’과 풍경화가로서 담보한 ‘장소성’이 중요한 특징들로 꼽힌다. 민정기 작품의 독립성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도구 역할을 함으로써 얻어졌다. 민정기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통 동양화나 고지도를 차용하는 고유한 화풍도 이러한 소통의 강조를 전제한다. 이는 “예전 것들을 통해서 오늘날의 모습을 그린다”는 의도를 반영하며, 따라서 과거를 향한 회고나 노스탤지어(nostalgia)와는 거리가 멀다.
한편 ‘장소성’은 해당 장소의 지형적, 지리적, 인문학적 지식이나 역사성에 주목하여 그 장소만의 독자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가의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1987년 서울에서 경기도 양평으로 스튜디오를 이전한 이후 작가는 산과 그 안에 터를 내린 사람의 흔적을 더욱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지명이나 고유명사로 이루어진 작품 제목들은 그의 이러한 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산세뿐만 아니라 강물과 도로, 나아가 도심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관심 범위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
민정기에게 작업은 스스로 ‘인연’이라 칭하는 작품과 본인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필연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답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몸소 다녀봐서 기억하고 있는 길들을 도해적 연결이나 지리적 배치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유화 물감과 서양의 조형어법을 통해 고지도나 산수화, 병풍 등의 방식을 차용하여 재해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같은 과거의 방식들이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하고 유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유 몽유도원>(2016)은 조선 초기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미지 위에 현재의 부암동 풍경을 병치시킴으로써 부암동의 태곳적 지세와 변모된 현실풍경을 극명하게 대비해 보여준다. <수입리(양평)>(2016)은 동양화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전통적인 부감법과 투시도법을 재해석하며 산과 강의 현재적 상황을 민화적으로 풀어낸다. 또한 각각 3매와 6매로 구성된 연작 <사직단이 보이는 풍경>(2019)이나 <인왕산>(2019)은 큰 화면을 그릴 때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을 극복하고자 익숙한 병풍의 형식에 착안, 여러 개로 나누어진 화폭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대중에게 익숙한 형식을 통해 지역의 지형적 정보, 역사적 지식, 서사성 등을 모두 한 화폭에 아울러 담고자 연구한 결과물이다.
역사를 시각화하여 평면회화에 시간성을 부여하는 민정기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한 화면에 다양한 시점과 시간의 공존, 즉 공시성(synchronicity)을 야기한다. 그의 화면은 녹색 계열 또는 황색 계열의 통일된 색감으로 구성되어 마치 2차원적 화면의 평면성을 부각시키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현대식 건물이나 간판이 과거로부터의 다양한 공간적, 시간적 층위들과 함께 해체된 후 재조합된 것처럼 원근법을 무시한 채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다.
일례로 신작인 <청풍계 1~2>(2019)는 대한제국의 관료였던 윤덕영이라는 인물이 일제강점기에 인왕산 자락에 지은 600평 규모의 프랑스식 건물을 예전의 지형을 바꾸고 가파르게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과 병치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윤덕영은 그 집에 입주도 못한 채 운명하였으며 그 후 건물은 여러 쓰임새로 사용되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결국 1970년대에 철거되었다. 작가는 이와 관련된 사료 연구와 답사를 통해 장소에 내재된 시간성을 복구,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본 화면들로 재구성했다. 또 다른 신작 <박태원의 천변풍경 1~3>(2019)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바탕으로 청계천의 변모한 모습을 생활 속으로 가져와 담은 작품이다. 민정기가 선택한 공시성의 방식은 ‘집단적 기억’ 같은, 애초에 통합될 수 없는 대상의 성질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식이자 서구의 이분법적이고 선형적인 시간 인식에 대응하여 보다 풍부한 서사를 구성하는 훌륭한 대안이 된다.
작가 소개
민정기(b. 1949)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대중적 일상 속에서 문화장치에 민감하게 반응, 이를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하며 독자적인 작업 스타일을 구축해온 작가는 지난 1987년 서울에서 경기도 양평으로 이주한 후 본격적으로 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 삶의 터전과 역사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민정기는 다른 서울대학교 출신 작가들처럼 국가가 지원하는 국전에 참여하는 대신 1980년부터 ‘현실과 발언’ 동인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면서, 소위 고급예술이나 순수미술을 거부하고 현대미술에 ‘상투성’을 부여함으로써 전통과 모더니즘의 간극을 해소하고자 시도하였다. 1970년대에 《12월전》, 《제3그룹전》, 1980년대에 《현실과 발언 동인전》 등의 단체전 활동을 이어오던 작가는 1983년 서울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2004), 조선일보미술관(2007), 금호미술관(2016) 등 국내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일민미술관(1999), 서울역사박물관(2013), 제8회 SeMA 비엔날레(2014), 경기도미술관(2016), 인사아트센터(2016) 전시 등이 있다. 지난 2006년에는 제18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원출처 : https://www.kukjegallery.com/KJ_exhibitions_view_1.php?page=current&ex_no=216&v=1&w_no=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