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 뒤
노석미
“우리나라의 겨울 시골 풍경이라는 게 초라하기 그지없지. 스산하고. 왜냐하면 초록이 사라지기 때문이지. 게다가 논이 많아서 벼를 베어버리고 난 뒤의 논 풍경은 정말이지 쓸쓸하게 느껴진다고.”
귀가 시릴 정도의 매서운 바람이 불고 공기는 차갑다. 사방을 둘러봐도 움직임이 있는 생명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이 추운 날씨에 어딘가에 숨어서 견디고 있겠지. 그렇게 건조하고 추운 날들이 반복되다가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공기가 촉촉해진다. 하늘이 흐려지고 나의 눈도 뿌옇게 초점을 잃는다. 잠시 후, 눈이 내린다.
눈은 스산했던 풍경들을 덮어준다. 그래서인가. 눈이 오면 따스하다. 갑자기 옷을 바꿔 입은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변한다.
‘아…눈이 부시다.’
눈이 온 뒤, 눈 풍경도 주울 겸 산책길에 나선다. 집에 돌아와 눈이 그린 그림을 나도 따라 그린다.
눈이 많이 내린 다음날,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길을 나선다. 걷는 그 길엔 눈과 음악이 있다. 누군가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참 슬플 거 같다. 어쩐지 미래라는 말이 나는 항상 슬프게 들린다. 미래를 걱정하는 현재의 삶을 달래어줄 수 있는 것은 하얀 눈과 음악뿐이란 생각이 든다.
산책길은 별로 특별하지 않다. 집을 나서 길로 들어선 후 어느 방향이던 걸으면 된다. 차가 다니는 길을 피해 주로 농로를 걷거나 둑길을 걷는다. 이렇게 눈이 온 뒤엔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길은 어쩌면 의미가 없다. 개울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여 있어 길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개울만 헛디디지 않으면 된다. 찻길과 농경지, 작은 개울, 간간이 집들, 축사 그리고 먼 산, 가까운 산 등이 보인다. 안 그래도 없지만 추운 겨울날, 더더욱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눈으로 덮여있다. 지저분한 것들은 다 사라졌다. 눈 위를 걷는 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뿌드득 척 뿌드득 척 뿌드득 척 하고 걷는다. 내가 걷는 건지 신발이 걷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신발아.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렴. 콧김, 입김이 난다. 털모자를 쓴 머릿속에서도 김이 난다. 그리고 점점 발이 축축해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