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16년 9월 21일 ~ 2016년 10월 11일
전시장소 : 스페이스22,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390, 미진프라자빌딩 22층
사선 (Looking Awry)
“익살에 깃든 저항의 눈초리”
이번 전시 <사선>에서 이희상이 선보인 작품들은 1987~2008년에 한국과 일본의 도시풍경이다. 1986년 그가 일본의 오사카 예술대학에 편입한 이후 작업들도 여기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 작업들은 지난 2016년 4월 홍대 앞의 카페 원 갤러리에서 열린 <도시의 포로 – 1981~1985> 전시와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작업의 시기가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전 1985년까지 그의 서울 사진은 거칠고 거북하다. 도일(渡日) 이후 그의 일본 도시 사진은 세련되고 산뜻하다. 일본은 이희상을 정돈시킨다. 일본의 맑은 햇살과 질서는 그를 그늘에서 양지로 내몬다.
일본의 오사카, 고베, 나고야의 사진에는 어디에도 어두운 그늘이 없다. 도시 속의 자연과 인물들은 물 흐르듯 평온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이동하는 순간 장면은 거칠어지고 비뚤어진다. 1988년 오사카의 사진에는 연인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계단을 막 내려오는 장면이 포착되는 데 반해, 1989년 서울 남대문의 한 풍경에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서로 등을 지고 오르내리는 세 여인 그리고 그 주변의 복잡하게 얽힌 실루엣과 뒤틀린 반사이미지들이 무질서하게 엉켜 있다. 일본 도시의 평화와 안정의 이미지에 대하여 서울의 혼란과 불안의 이미지가 대조를 이룬다. 1년을 격차로 두 나라 사이에서 이희상의 에고(Ego)는 극단적으로 흔들린다.
일본 유학은 이희상에게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도시의 포로>전 사진이 프레임 밖으로 얽히는 거친 이미지였다면 그 이후의 사진에서는 이미지들이 프레임 안에 효율적으로 안착하고 있다. 서울의 중심부와 주변부 그리고 서울 시내와 근교의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한 이번 사진 속 이미지들이 정적(靜的)이지 않은데도 <도시의 포로>전에 비하여 훨씬 부드럽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도시의 포로>전과 이번의 <사선>전을 접하면서 도시사진에 대한 이희상의 기본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그가 피사체를 대하는 작가적 시선, 피사체에 접근하는 인간적 내용 그리고 그러한 시선과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목표와 관련된다. 나는 이들을 각각 ‘사선’, ‘익살’ 그리고 ‘저항’으로 파악한다.
전시 제목 ‘사선’은 몇 가지 뜻을 동시적으로 내포한다. 우선 사선(寫線)은 사진을 찍는 선, 즉 사진가가 서 있는 선이다. 다음 사선은 슈팅할 때 총알이 날아가는 선, 즉 사선(射線)과 통한다. 다음으로 사선(斜線)은 비뚤어진 선이다. 사진 속 이미지가 비스듬할 수도 있고 사진가의 시선과 마음이 삐딱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사선(死線)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이다. 사진작업의 치열함을 뜻한다. 이런 다양한 의미에서 이번 이희상의 전시제목 <사선>이 출현했다. 그는 사선(寫線)에서 사진의 본령을 지키면서 슈팅(射線)하고자 애쓰며, 사태를 비스듬하게(斜線) 포착함으로써 사태의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고,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필사적으로(死線) 발품을 팔며 배회한다.
이 가운데 작가적 시선과 관련되는 ‘사선(斜線)’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비스듬하게 보기 혹은 삐딱하게 보기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라는 책에서 사태를 삐딱하게 보는 태도는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냥 간과했을지도 모르는 측면을 가시화해 준다.”고 말한다. 이희상은 사물과 사태를 삐딱하게 본다. 비스듬하게 봐야 잘 보인다. 증명사진을 촬영할 때 얼굴을 옆으로 살짝 돌려 찍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림뿐만 아니라 사람도 시각을 살짝 비틀 때 대상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정면은 요소들을 평면으로 만들지만 측면은 요소들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희상은 삐딱한 시각을 통해 도시의 표면이 아니라 그 속살과 숨결을 드러낸다.
여기서 ‘사선’은 명시적이면서 동시에 암시적이다. 사진 속 이미지 자체에 사선의 요소가 직접 드러나 있는가 하면 시각 이미지가 아니라 의미상 기울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서울역의 계단을 오르며 동료 노숙자에게 손을 내미는 노숙자, 경복궁의 석조물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아이들 배후로 팔을 계단의 사선과 나란히 하고 오르는 아이, 목을 기울인 채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장애인, 온통 흰색으로 분장한 팬터마임의 기우뚱한 자세, 기울어진 자세로 양 팔을 들고 있는 아이들 등에는 사선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사선’이 암시적으로 함축하는 엇갈림과 뒤틀림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들도 여럿이다. 의상 브랜드 시스템의 광고물 속 여성과 대비되는 노점상 아주머니의 힘없는 눈빛, 샤넬 광고물이 설치된 버스정류장 안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여인, 홀로 그네에 배를 깔고 땅을 응시하고 있는 아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걷고 있는 노부부, 서로 등을 돌린 채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 남학생과 여학생, 서로 비껴가는 도심 인물들의 차가운 시선들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선의 풍경들을 이희상은 익살스럽게 포착한다. 익살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사태를 우스꽝스럽게 비틀어 표현하는 행위이다. 손가방 안에 고개만 내밀고도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아지와 이 강아지를 힘겹게 나르는 아이의 찡그린 표정, 그리고 공원에서 발가벗은 채로 잠이 든 남동생의 고추를 살그머니 만지는 여자아이. 하지만 이희상 사진에서 익살은 대개 우회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예기치 않은 장면으로 나타난다. 아담과 이브의 모습처럼 나무 밑의 벌거벗은 남녀, 얼굴에 흰색 약을 칠하여 마치 가면이 벗겨진 것 같은 모습, 어정쩡한 자세로 사진 찍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애인, 철대문 앞에 덩그러니 방치된 고릴라 인형, 김수환 추기경 추모식에서 철제 난간에 몸을 실고 있는 아주머니, 홀로 그네에 배를 깔고 생각하는 아이, 은행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쌍둥이 여아가 마치 반사이미지처럼 마주하고 있는 풍경 등이다.
이희상은 사물과 사태를 기본적으로 진지하게 관찰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촬영하진 않는다. 그는 무거운 것을 경쾌하게 표현한다. 그렇지만 그 경쾌함 속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다. 그의 익살은 저항을 지향한다. 익살을 담은 저항은, ‘놀이공원에서 아이들을 향해 철창을 기어오르는 점박이개’나 ‘가방 안의 편안한 표정의 강아지와 대조를 이루는 아이의 찡그린 표정’ 그리고 ‘대문 앞에 버려진 고릴라 인형의 눈빛’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익살스럽다고 보긴 어렵지만 이희상의 작품 전반에서 저항의 기미가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식에 참여한 인파, 지구본을 힘겹게 받치고 있는 남자의 조형물에 덩달아 힘을 실고 있는 인부들, 등반 훈련용 콘크리트 벽을 힘써 오르고 있는 여자아이, 권태로운 표정으로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 무기력하고 허탈한 눈빛의 행인들 등이다.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은 지극히 어수선하고 무미건조하며 무거운 미장센을 연출한다. 이 안에서 이희상은 삐딱한 시선으로 익살스럽게 도심의 저항어린 눈초리를 찾는다. 그의 익살은 세속의 가치들을 희화화하여 전복(顚覆)함으로써 현실의 세태를 풍자하고 그것에 저항한다. 그는 도시 속 풍경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읽어내 불만과 저항의 눈빛을 들춰낸다. 중심에서 비껴나 있는 주변인들의 익살스런 모습에 작가의 저항정신을 투사한다. 이는 비껴가는 시선들, 서로 역행하는 힘들 그리고 무관심과 무기력한 표정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도시인의 고독과 권태와 소외에 따른 부조리의 현장을 경쾌한 터치로 묘사한다. 카뮈의 말대로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는 일이야 말로 부조리에 저항하는 기초적인 행위이다. 자신이 처형되는 날 구경꾼들이 많이 와주길 바라는 카뮈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이희상은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익살로 마중한다. / 유헌식(문예비평가, 단국대 철학과 교수)
원출처 : http://www.artbava.com/exhibit/detail/4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