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5. WED ~ 2019.08.10. SAT
<경계에 경계를 포개어 놓다>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이원호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가 드러내는 경계는 너무 익숙해서 인식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깊숙이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규칙과 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의 큰 테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자본주의의 금전적인 가치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여 그 실체를 전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먼저 이번 전시인 《적절할 때까지》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 이전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지를 간단히 파악해 보도록 하겠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근작들의 특징들이 드러날 것이고, 이렇게 발견된 차이들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원호의 작업은 작가가 직접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과정을 영상과 사진으로 담아내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오브제들을 전시하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The White Field>시리즈와 같이 운동 경기를 진행하기 위한 하얀 선들을 지워나가는 행위를 통해 일상적인 장소에 시스템이 작동되기 위한 기본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에 머물렀었지만, 그 이후에는 작가의 생각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접근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그가 설정한 특정 인물에게 접근하여 물건을 구매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자본화하고 금전적 교환 가치로 환산하는 현실과 실제 사회 구성원이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층 Story Ⅰ>에서처럼 걸인들이 동냥을 받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통을 구매하고자 하는 시도나 <진품명품전(傳)>에서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골동품이 가치가 없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은 이후 그 사람들이 가진 물건들을 작가가 다시 사들이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기본적 상식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을 벗어나는 다양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어떤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야기들과 함께 작업을 제작하기 위한 여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과정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그가 작업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이는 작가의 접근을 거부하거나 혹은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데에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주는 직접적인 조력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작가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관계가 형성되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이야기와 오브제들을 획득함으로써 우리가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보이지 않는 견고한 자본주의의 경계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지를 보여주어 왔다. 작가의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의문들은 이후 우리 사회에 가치 구조를 생존의 기본 조건인 집이라는 대상으로 한정시켜서 부동산과 관련된 작업으로 집중되었다. <부(浮)부동산>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홈리스들이 소유하고 있는 박스로 된 집을 구매하고 이를 모두 펼쳐서 하나의 큰 집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고, <자유롭지 못한 것들을 위한>은 제주도에서 한정된 돈에 맞추어 땅을 구매하려는 시도를 통해 땅을 소유하기 위한 과정과 부동산의 가치에 대한 욕망, 갈등, 소외, 허상 등을 자연스럽게 표출시켜 나갔다.
이제는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들을 살펴보자. 《적절할 때까지》는 두 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어디론가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찍은 5채널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들이 어떤 글을 읽어가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연기를 완성해 나가는 3채널 영상이다. 먼저 <적절할 때까지Ⅰ>에서 작가의 걷는 모습은 특별할 것도 없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행동처럼 보인다. 화면 중앙에 작가의 상반신 뒷모습이 위치한 앵글은 마치 게임의 플레이어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화면 속 작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어딘가를 하염없이 걷고 있어서 마치 목적지가 없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더해 영상 전반에는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흘러 나온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이유로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일까? 그는 우선 이 작업을 구상하면서 지도를 펼쳐놓고 오각형의 집 모양을 서울이라는 경계 안에 가장 넓게 그려 넣었다. 물론 이는 이전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던 부동산과 집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단순히 시작점을 촉발하는 계기에 불과하며, 이전의 부동산을 다루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특정한 인물을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막대기 하나를 들고 5개의 꼭짓점에 도착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그가 설정한 직선의 길을 도시에서 실제로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에 의해서 제공되는 길과 GPS 정보를 사용하는 것이다. 작업 속에서 그는 직선의 길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로 골목을 헤매고, 끊임없이 우회하기도 하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자신이 설정한 꼭짓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미 직선으로 걷는 목표는 시작부터 실패를 전제로 한 계획이므로, 목표에서 중요한 지점은 직선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의 계획을 달성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화면에 보이지 않는 그의 동반자인 땅을 질질 끌려다니면서 닳아버린 나무 지팡이는 그가 실제적으로 길을 걸어냈다는 증거물로써 전시장에 가득 찬 소리로 그리고 실물로 나타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길과 이미 주어진 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포개어 놓는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 여러 규칙과 경계로 이루어진 도시 공간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를 드러내고자 한다. 최근의 많은 정보와 여러 규칙이 빠르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노출된 세상에서는 오히려 그 환경에 익숙해질수록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렇게 도시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을 작가는 수행적인 행동으로 구체화시켜 보여준다. 이런 방식은 그의 이전 작업에서 명확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모호하긴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이 가지고 있는 경계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이다. 작가가 자신이 설정한 길을 걷는 것은 순간적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에 일반적이지 않은 행위이며, 규칙적인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원히 사회의 구조에서 이탈한 채 살아갈 수는 없다. 이렇게 그가 도시를 통해 바라보는 사회는 잠시 동안의 일탈만이 가능할 뿐 결국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이상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 경계를 우리가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더욱 명확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고,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우리에게 불명확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시제목과 같이 우리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적절할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이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는 전시와 작품 제목과 같이 <적절할 때까지>에 적절한 상황이며,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목적이 있었으나 목적이 사라져버린 혼자만의 행진으로 나타난다.
한편 다른 작품인 <적절할 때까지Ⅱ>는 지금까지 그가 활동하면서 받았던 여러 필자의 글 중에서 특정한 단락을 선택해서 발췌하여, 배우들에게 읽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작업은 배우들이 글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어떤 하나의 캐릭터로써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대본 연습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영상 속에서는 세 가지의 경계가 겹쳐져서 나타난다. 하나는 실제로도, 이미지로도, 텍스트도 등장하지 않는 이원호의 작업들이다. 두 번째는 이원호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나간 필자들의 글을 들려주는 배우의 대사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러한 비가시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서 연극의 대사처럼 읽어내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어떤 인물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발생한다. 세 명의 주체가 겹쳐지면서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각자의 경계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은 작가인가 필자인가? 이 낭독에서 이원호의 작업을 읽어내야 하는가? 아니면 작품을 해석한 필자의 시선을 읽어야 하는가? 혹은 배우의 연기에만 주목해야 하는 것인가? 여러 갈래의 길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물론 선택은 관객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진다. 모든 것은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겹쳐지면서 명확하던 이야기는 불명확하게 변화되어 나간다. 배우들에 의해 가상의 인물이 구체화되어 나타나지만, 결론적으로는 배우가 적절하다고 판단이 되어 연기를 중단하면 끝이 나면서 모두 서로 분리되어 현실의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모든 경계가 포개지는 상황은 배우의 연기로만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이 해석해 나가는 각자의 기준과 방식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원호의 두 작품에서는 이전까지 누군가를 만나서 발생하는 우연적이며, 구체적인 서사들은 모두 사라졌다. 오히려 자신이 새롭게 설정한 경계와 이미 존재하는 경계들을 겹쳐놓으면서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에 집중하며, 이를 통해 기존의 각자의 경계에 의해 고정된 것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어느 순간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기에 작가는 명확한 경계들이 포개지는 반복적인 상황들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이러한 과정들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원호가 작업 전반에서 보여주는 적절할 때까지는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적절할 때까지’라는 표현은 한편으로 협상, 타협, 순응의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그의 작업에서 말하는 기존의 대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고는 모든 것이 혼재된 중간지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천 속에서 각자의 경계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였을 때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지점은 사회와 우리 그리고 우리와 우리 사이에 밀착되어 있는 어떤 형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경계들이 끊임없이 포개어 나갈 때 우리 개인들이 주체적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작업에서 들려오는 끈질기면서도 숨가쁜 소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로 점철된 지난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편안함과 익숙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보편적 사고로써의 사상과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안에 안주해서 전혀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완벽하게 전복시키고 부정하는 방법을 통해 특정한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 모두 문제라 말한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한번에 뒤집어서 새롭게 만드는 혁명이 아니라 결론이 나지 않는 끊임없는 봉기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현재의 강박적 이미지의 변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서 그 실천으로써 각자의 경계를 가진 것들이 서로 포개어지기를 반복하여야 한다. 결국 작가는 한 개인이 자신만의 생각을 통해 적절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경계를 포개어 놓는 수행적 과정들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무심하게 우리에게 성찰해 나아가야 할 과제를 던져준다.
원출처 : http://perigee.co.kr/gallery/exhibitions/view/2019/174